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월터 크루거 (문단 편집) == [[제2차 세계 대전]] == 1940년 크루거는 제3군 예하 제9군단장으로 부임한다. 1940년 제3군은 월터 쇼트 장군의 제4군과 모의전을 붙게 되었는데 이 때 제3군에서 차출된 것이 크루거의 9군단이었다. 크루거는 6월에 제7군단장으로 발령받았으며 이듬해 중장으로 진급하면서 제3군 사령관이 되었다. 이 당시 그는 남부방위사령관을 겸직하였으며 이 때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를 참모장으로 요청하여 휘하에 두고 있었다. 루이지애나 기동훈련 때 크루거의 제3군은 벤 리어 장군의 제2군과 모의전을 치렀다. 루이지애나 기동훈련은 교리와 장비의 시험대로서 고급 장교들에게 제대를 직접 기동해보는 기회가 되었다. 이 때 크루거는 현대전에 완전히 적응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북동쪽에서 북서쪽으로 전선을 급격하게 움직이는 기동전을 선보이는 한편 [[조지 S. 패튼]]의 제2기갑사단을 통해 대우회기동을 실행함으로써 리어의 제2군을 꺾었다. 크루거는 지휘에서 완전히 자신감을 가진 것으로 보이며, 이 때 친구에게 쓴 편지를 보면 "내가 10년만 더 젊었어도 롬멜에게 '롬멜' 할 수 있었을 것이다"라며 자신의 나이를 한탄하기도 했다. 원문은 아래와 같다. >There's nothing that I should like better than to have a command at the front. I should love to try to "rommel" Rommel. However, I am sure that younger men will be selected for tasks of that nature, in fact for all combat commands. I shall be 62 this coming January 1943, and though I am in perfect health, can stand a lot of hardship and people tell me I look and act ten years younger, I do not delude myself. > 전선에서 지휘하는 것보다 좋은 건 없는 것 같아. 롬멜에게 "롬멜" 하는 것도 재미있을테지. 하지만 그런 건 더 젊은 사람들이 맡을 건 뻔해. 1943년 1월이면 예순둘이야. 비록 나는 무척 건강하고 남들이 말하길 내 나이보다 10년은 더 젊어 보인다고 하지만 스스로를 속여넘길 생각은 없네. 그러나 크루거의 예상과는 달리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이 태평양 전선에서 그를 보내줄 것을 요청하면서 제6군 사령관을 맡아 전선에 서게 되었다. 크루거는 비록 맥아더와 같이 전쟁계획국에 소속되어 있기는 했지만 교류가 거의 없었기 때문에 맥아더가 그를 콕 찝어 요청하자 꽤 놀랐다고 한다. 그의 제6군은 남서태평양해역군 예하로 비스마르크 군도 전역부터 투입되었다. 크루거는 제6군 사령관으로서 정보를 수집하려 했으나 해군의 협조가 미진했고, 육해군의 협조에 불협화음이 계속 발생하자 스스로 정찰대를 만들어 편성했다. 이들이 알라모 정찰대로 전쟁 기간 중 106회의 임무를 수행했다. 제6군은 뉴기니에서도 여러 작전을 동시에 전개하였으며 타나메라, 훔볼트 만, 아이타페 등에서 동시에 전투를 치렀으며 모두 승리했다. 1944년 9월 크루거와 제6군은 [[필리핀 탈환전]]에 투입되었다. 10월 제6군은 레이테 공략을 나섰으나 태풍이 닥쳐 일정이 다소 연기되었고, 일본군은 준비할 시간을 벌게 되었다. 실제로 일본군은 5개 사단과 2개 혼성여단이 증원되었다. 이 때까지 잘 해왔음에도 불구하고 제6군은 레이테 탈환전에서 좋은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다. 결과적으로 신속하게 기동하여 일본군을 몰아붙이는 것이 정답이었으나, 크루거는 과거 본인이 보여줬던 기동전을 선호하는 모습과 달리 신중하게 움직였고 일본군이 준비할 시간을 준 꼴이 되고 말았던 것이다. 결국 레이테 섬의 공략에는 필요 이상의 희생이 발생하고 말았다. 1945년 루손 섬 탈환전에서 비로소 크루거는 자신의 장기인 대부대 지휘를 발휘할 기회를 얻었다. 이전까지는 전장이 태평양의 군도였기 때문에 대부대가 기동할 공간이 없었고 부대를 여러 갈래로 쪼개 동시에 작전을 벌이는 형태였지만 루손 섬은 가운데에 넓은 평원을 끼고 있어 대부대 지휘가 가능한 공간이 있었기 때문이다. 크루거는 [[야마시타 토모유키]]가 전개시킨 일본군 제2기갑사단을 격파하고 일본군의 초기 저항을 완전히 꺾었다. 크루거는 야마시타의 기갑부대 운용이 어설펐다고 평가했다. 실제로 기갑사단을 미군과 정면대결 시키는 대신 방어지점 중 취약한 지점을 보강하는 방식으로 쓰는 편이 미군의 희생을 더 강요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한편 맥아더는 마닐라에 일본군의 병력이 별로 없을 것이라 여겨 크루거에게 마닐라 공격을 독촉했다. 맥아더의 정보 참모인 찰스 윌로비 준장이 일본군은 17만여 명만 있다고 보고했기 때문이었다. 맥아더는 일본군이 마닐라를 포기할 것이며 결과적으로 저항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러나 크루거의 정보 참모 호튼 화이트 대령은 23만여 명이 있다는 보고를 올린 상태였기 때문에 크루거는 신중하게 접근하고 있었다. 실제로는 마닐라에 29만여 명에 달하는 일본군이 주둔하고 있었다. 맥아더의 독촉에 따라 크루거는 마닐라로 진격하여 점령하는 데에 성공했지만 큰 희생을 치르고 말았다. 1945년 3월 크루거는 대장으로 진급하였다. 일본이 항복하자 점령군으로 혼슈 서부 지역에 진주했으며, 전후 군축이 본격화되면서 1945년 12월 31일 제8군에 임무를 인계할 때까지 주둔하였으며, 1946년 1월 25일 임무가 해제되었다. 크루거는 그대로 예편하였다. 제6군을 지휘한 공로로 크루거에게 수훈십자장과 2번째 육군 공로훈장, 해군 공로훈장이 수여되었으며 일본 점령군 임무를 수행한 공훈으로 3번째 육군 공로훈장이 수여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